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 대기근 (문단 편집) == 과정 == 소련의 스탈린은 신경제정책([[NEP]])으로 느슨해진 식량 생산 때문에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자 [[사회주의]]적 집단화 정책으로 통제를 극대화 함과 동시에 계획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려 했다. 하지만 자영농들은 자기들이 힘들여 일군 농사의 열매들이 자기들이 아니라 [[집단농장]]으로 넘어가게 되니 당연히 반발했고, 따라서 당시 공산주의의 큰 목표였던 집산화 자체도 느리게 전개되었다. 곡물의 생산량도 당국의 기대보다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스탈린 집권 초기까지도 공산당은 드넓은 러시아의 지방 곳곳에 행정력을 발휘할 인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현지의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은 확고한 중앙의 지휘를 따른다고 보기에는 너무 지방밀착적이었고 중앙에서 보기에 구시대의 관료와 결탁했거나 옷만 갈아입은 자로 의심되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이고 또 중요 직책을 차지하기도 쉬웠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으나 중앙은 편집증적으로 숙청을 진행하여 부르주아 출신 귀족 출신을 제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방 행정의 관료들이 겨우 문맹을 면할 정도인 탄광노동자 출신 등으로 구성되면서 전문성과 상식이 너무 떨어져 지방통제를 전혀 효과적으로 할 수 없었다. 한편 기존의 러시아 지방행정을 담당하던 차르의 관료와 귀족들은 혁명과 내전통에 쓸려나갔고 붉은 군대에 협력하던 러시아 각지의 농민들은 혁명으로 귀족과 차르가 없어지면 나라에 내는 세금 이외에 그들에게 낼 소작료를 안 내도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러시아 공산당 지도부와 지방 당원들도 으레 그런 걸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니 문제가 발생했는데 농촌에서 착취가 중단된다는 말을 다시 말하면 부재지주가 러시아 농촌의 곡물을 착취 수준으로 긁어모아서 모스크바를 포함한 도심지에 팔아서 공급하던 시스템이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시로의 곡물 유입이 괴멸적으로 줄어든 건 내전중에는 내전탓이라고 생각했으니 문제의 원인이 "농민에게 귀족들이 행하던 착취의 부재"에 있다는 걸 소비에트 지도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내전이 끝나도 도시에 대한 곡물 공급이 전혀 호전되지 않자 문제가 무엇인가를 순식간에 다들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차르 정부 때보다 공식적인 수탈량을 올릴 수는 없었다. 해답은 대대적인 곡물징발대의 운용이었다. 도시 출신의 군인들을 곡물징발대로 편성해 농촌에 보냈다. 명목은 공산주의의 발전과 건설을 위한 "기부"였지만 총칼을 든 외부인이 종자와 겨울 내내 버틸 식량조차도 모두 빼앗아 가는 행태 덕에 농민들은 극렬히 저항했고 이는 무력으로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행정조치로 수취량을 조사한 후 수탈한게 아니라 애초에 숨겨 놓은 물건이 많을 것이라고 간주하고 눈에 보인 것 전체를 몰수하는 징발대를 운영했으니[* 물론 서류상으로는 말로 협조를 구하고 기부를 받는 형식이었지만 그걸 수행항 군인들도 굶주려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니 실제로는 농촌을 습격하여 논밭, 창고를 다 털어낸 후 저항하거나 예쁜 처자가 있다면 강간, 총살하고 수탈한 식료는 일부 삥땅치고 상부로 올려보내는 형식이 되었다.] 농민이 협조하면 아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필사적으로 수확물과 가축을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징발대가 순순히 협조를 고하면 농민들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협박과 고문을 통해 "취조"하면 성공적으로 수확물이 "발견"할 수 있었다. 번번히 나타나는 이런 상황은 중앙당에게 있어 농민의 반동성을 확인시켜 주는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여졌으며 점점 수탈은 거의 농촌에 대한 습격에 가까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스탈린은 자영농을 부농 즉 "[[쿨라크]]"로 칭하며 국가의 적으로 명문화하고 이들에 대한 약탈을 장려했다. 징발대는 곧 사실상 국가공인 산적떼나 다름없었다. 스탈린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자들이 농민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들을 [[쿨라크]], 즉 반혁명적인 부농이라고 칭하고 격멸하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농민이 반혁명분자로 인식되는 건 전혀 이상할 일이 없는 문제였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러시아 농촌에서 무슨 부자 자영농이 그렇게 많냐는 의문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현실에 지옥도가 펼쳐졌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은 지표면 아래 1.5m까지 차 있는 [[초르노젬]](Чорнозем, 흑토) 덕분에 막말로 씨만 뿌려도 농사가 되는 지역이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프레리, 아르헨티나 [[팜파스]], 중국의 둥베이와 함께 세계적인 옥토로 꼽힌다.] 넓어 전통적으로 자영농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집단화 정책과 함께 곡물 생산량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쿨락(부농)들을 소련 정부가 때려잡기 시작하자 생산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 이렇게 집단화 정책이 농민들의 반발로 인해 재앙적인 효과를 초래하게 되자[*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극렬하게 반대한 이유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계이기는 하나 농업 경영 방식에서는 러시아 농민들과 다른 길을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농민들이 오랫동안 미르(mir)라는 농촌 공동체를 통해 토지를 공유해 왔다면 우크라이나 농촌은 전통적으로 토지의 개인 소유와 개별 영농 성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랬기에 러시아에서는 농업 집단화 정책이 전반적으로 커다란 반발 없이 수용되었던 것에 비해 우크라이나 농촌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뒤따랐던 것이다.]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곡물 수탈 계획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자 했는데 집단화로 워낙에 농업 생산력이 망가져 버린 까닭에 우크라이나의 경우 수탈량을 원 계획에서 3분의 1까지 줄였는데도 최악의 국면을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목축업 문제 역시 심각했다. 가축을 기르는 체제가 갑작스레 집단화되자 농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공산당원들은 온갖 문제에 부딪쳤다. 거기에 사료도 부족했고 날씨마저 돕지 않았다. 그리고 또 원시적인 농업에서 밭을 갈던 말 등이 [[기아(동음이의어)|기아]]로 쓰러지면서 다시 파종 등 농업에 차질을 빚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와 함께 기근이 참혹했던 돈강 유역에서 자란 러시아 작가 미하일 숄로호프는 그 군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말 그대로 '''"남 줄 바엔 잡아먹자"'''였다. >가축이 그레먀치 로크(Гремячий лог)에서 매일 밤 도살되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기 무섭게 약한 양의 외마디 울음소리, 돼지가 죽을 때 내는 가느다란 소리, 그리고 송아지의 음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콜호스에 참가한 농민들도, 개인농들도 모두 가축을 살해하였다. 종우(種牛)는 물론이고 황소, 양, 돼지, 심지어 암소까지도 도살되었다. 그레먀치의 뿔 있는 가축은 이틀 밤 사이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개들은 내장을 끌고 마을로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땅광과 헛간은 고깃덩어리로 가득 찼다. 협동조합들은 18개월 동안이나 창고에 처박혀 있던 약 200푸트(Пуд)[* 러시아의 옛 질량 단위로 (1899년 이후) 1푸트는 약 16.38kg에 해당한다. 200푸트면 거의 3,200kg에 달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가축들이 도살되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그 많던 고기도 얼마 안 가서 다 없어졌다.]의 소금을 이틀만에 팔아치웠다. '죽여라, 그것은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죽여라, 그들은 어쨌든 그것을 고깃덩어리로 생각할 것이다', '죽여라, 콜호스에서 당신은 고기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는 별별 음험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그들은 가축을 죽였다. 그들은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먹어댔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모두 배앓이를 하였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삶고 구운 고깃덩어리로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입가에 기름칠을 하고, 마치 장례식 전날 밤처럼 딸꾹질을 해댔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먹는 것에 취해버린 듯, 올빼미처럼 눈만 끔뻑거렸다.[* 이런 협동농장화에 반발하여 농민들이 가진 재산을 파괴하거나 팔아 버리거나 소비해 버리는 일은 이후에 마오쩌둥 주도로 공산화된 중국에서 반복되었다. 중국에선 위에서 언급된 가축 도살뿐만 아니라 숲 전체를 베어 팔아 버리고 집까지 부숴서 벽돌로 만들어 팔아 버리는 등 저항이 이어졌고 이마저 통하지 않으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 > M. 숄로호프, 뒤엎어진 땅. (M. Sholokhov, The Soil Upturned, 영어본, Moscow 1934), 152면) 이 당시 우크라이나는 아직 기계화 영농이 발달하지 못했기에 마소와 같은 가축은 필수적인 농사 수단이었다. 가축 수의 절대 부족은 바로 농업 생산량의 격감으로 이어졌고 식량 부족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1932년경에는 농작물의 작황 또한 좋지 못했는데 고르지 못한 날씨와 농업 사보타주가 겹친 결과였다. 이 지경에서 국가에서 할당한 징발량을 억지로 채우고 나면 당장 끼니를 때울 식량마저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러한 사태를 가장 집중적으로 직면했던 국가가 바로 우크라이나였다. 한편 우크라이나 법원에서는 이 대기근이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학살 범죄'''라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3073701|규정하고 있다.]] 다만 이것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종 청소 내지는 소련 농민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유도된 대기근이었는지, 아니면 단순 정책 실패였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이 문제에는 우크라이나의 정치 구도와도 관련이 있어서 반러파가 집권하던 시기에는 소련의 인종 청소 시도라고 법적으로 명시되었다가 친러파가 집권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이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등 해마다 공식 입장이 달라진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